(2018.03.03 글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미움 받으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위대한 하나의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 여기서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프 속에 깃들어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 받는 나뭇가지겠습니까,
향기를 피우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 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 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슬픈 왕관
언젠가 슬픈 왕위에 오르는 날이 있다.
언젠가 무릎을 꿇게 하는 밤이 있다.
그럴 때 난 기도를 한다. 언제고 한 번
내 머리에서 왕관을 벗게 되기를.
나는 오래도록 그 무거운 압박을 받아야만 한다.
한 번은 언젠가 그 대가로 내 왕관의
푸른 터키석 구슬과 다이아몬드와
그리고 그 루비의 눈을 떨리는 몸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어쩌면 그 보석의 빛은 이미 옛날에 사라진 것일까.
나의 손님인 비탄이 혹은 빼앗아 갔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쓴 왕관에는
한 알의 보석도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슬픈 왕위에 오르는 날이 있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자리였으나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해야했기에 고통스러웠다.
이제 이 왕관에 한 알의 보석도 없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그래서 왕관을 벗고 나의 보석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어리석고 후회 가득한 왕이 아닌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다.
언니 블로그를 읽다가 언니도 릴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어서 발췌.
당신은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가지 큰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조차도 당신한테 힘들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큰 슬픔이 그냥 스쳐 지나갔다기보다는 당신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지는 않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내면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당신의 본질 가운데 어딘가, 어떤 부분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다만 슬픔을 사람들 틈으로 가져가서 그 슬픔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위험하고 나쁜 일입니다.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대충 병을 치료할 때처럼 그 슬픔은 잠시 물러났다가 짧은 휴식을 취한 뒤 훨씬 더 걷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엄습해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마음속에 쌓이는 그 슬픔은 삶, 즉 그로 인해 우리가 죽을 수도 있으며 살아지지 않고 거부된, 잃어버린 삶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 그리고 우리의 예감을 넘어 우리가 조금이나마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기쁨을 맛볼 때보다 더 큰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슬픔을 견뎌낼 것입니다. 슬플 때가 바로 무언가 새로운 것 또는 미지의 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수줍어서 주저하며 입을 다무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뒤로 물러나고 정적이 나타나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이 그 가운데 서서 침묵을 지킵니다. 우리의 슬픔은 거의 모두가 우리의 생소해진 감정이 살아 있는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우리에게 마비된 상태로 느껴지는 긴장의 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친숙하고 익숙한 모든 것은 우리한테서 잠시 떨어져나가고 우리는 자신에게 나타난 생소한 것과 혼자 있게 됩니다.
또 우리는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상태인 어떤 과도기의 한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 또한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새로운 것, 즉 새로 추가된 것은 우리 심장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 가장 안쪽에 있는 심실로 옮겨간 후 그곳에도 더 이상 없고 이미 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우리를 믿게 만들기가 쉬울지 모르겠으나, 손님이 오면 집이 달라지듯 우리도 변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왔는지 말할 수 없고 또 어쩌면 그것을 영영 모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가 다가오기에 앞서 우리의 내면부터 달라지기 위해 미래가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징후는 많습니다. 또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슬플 때 고독한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멍한 듯한 순간에 미래는 우리를 기습하며, 그밖에 소란스러운 불의의 시점보다 훨씬 더 삶에 가까이 서 있습니다. 그런 시점에는 미래가 마치 외부에서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자로서 더 조용하고 더 참을성 있으며 솔직할수록, 새로운 것은 그만큼 더 깊이 그리고 더 확고하게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럴수록 우리는 새로운 것을 더 잘 습득하게 되며 그것이 더욱더 우리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먼 훗날 그 일이 ‘일어나면'(다시 말해 새로운 것이 우리한테서 다른 사람에게도 옮겨가면) 자신이 새로운 것과 유사하며 가깝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생소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전부터 우리의 일부였던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우리의 발전도 점차 그런 방향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 방에 있다가 어떤 준비나 과도기 같은 것도 없이 갑자기 높은 산꼭대기에 우뚝 세워진다면 그와 비슷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불안감과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존재에 내던져진 느낌이 그를 파멸로 몰아갈 지경에 이르겠지요. 그는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거나 무한한 공간으로 내팽개쳐진 또는 수천수만 개로 산산 조각난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자신의 감각을 원상태로 회복시키고 해명하기 위해 그의 뇌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꾸며낼지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고독해지는 자를 위해 거리를 비롯하여 모든 척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변화로 인해 갑자기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사람의 경우처럼 예사롭지 않은 상상과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듯 보이는 기묘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것도 체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되도록 넓게 받아들여야 하고, 듣도 보도 못한 일 등 어떤 것이든 그 안에서 가능해야 하니까요.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용기입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기묘하고 이상한 그리고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용감해지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세계가 공포에 차 있으면 그것은 곧 우리의 공포이며, 우리의 세계에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으면 그 틈은 곧 우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또 그곳에 위험이 있으면, 우리는 그 위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어려운 것에 의지해야 한다고 조언해주는 그 기본법칙에 자신의 삶을 맞추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가장 낯설게 보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친숙하고 충실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민족의 시초가 되는 옛 신화들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극적인 순간에 공주로 변하는 용에 관한 신화도 있듯이, 어쩌면 우리 삶의 모든 용은 언젠가 아름답고 용기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볼 순간만 애타게 기다리는 공주일지도 모릅니다. 또 끔찍한 것은 무엇이든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속수무책으로 우리의 도움만 바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카푸스 씨, 당신이 아직 본 적 없을 만큼 큰 슬픔이 당신 앞에 나타나더라도 놀라서는 안 됩니다. 불안감이 마치 빛과 구름 그림자처럼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다니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이 당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당신을 손 안에 꼭 쥔 채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어째서 당신은 어떤 불안감이나 어떤 고통, 어떤 우울한 기분 같은 것을 당신의 삶에서 내쫓으려 합니까? 그런 상태들이 당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아직 모르면서 말입니다. 당신은 어째서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로 자신을 괴롭히려 합니까? 당신이 과도기에 있으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1904년 8월 12일
스웨덴의 플래디에 위치한 보르에뷔 고르드에서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어린 시절 그 자신으로 온전히 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딸을 잃은 괴로움에 갇혀 그를 딸처럼 키웠고, 아버지는 부모님의 이혼 후 더이상 릴케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경제적 빈곤은 겪지 않았지만 분명 그는 정신적, 감정적 빈곤을 겪었으리라. 그가 감수성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겨우 대학에 와서 예술, 역사, 철학, 법학 등의 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였다. 그런 릴케는 연상의 문학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통해 정신적 도약을 이룬다.
그녀는... 그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고 따뜻한 모성의 존재가 되어 주었고,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정신세계를 접하게 해 주었다. 릴케는 그 여인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릴케와 루 살로메는 서로를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해졌다. 서로를 끝없이 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 그런 존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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