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청춘의 비극과 카타르시스 : 2018 HYUKOH TOUR IN LOS ANGELES 후기

Glaukopis 2018. 10. 15. 14:04

카톡 프사에 있는 3인방 중 한 명이던 은별이가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고 나서, 크리스탈과 나는 동시에 마지막 남은 1년을 공부보다 좀 더 소중한 것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중 하나는 같이 콘서트 가기!

크리스탈이 방탄소년단만큼 혁오를 좋아하는지라 꽤 오래전부터 (한 1년~2년 정도 된 것 같다) 콘서트 이야기를 꺼내길래 9월 초 쯤에 좌석 티켓을 미리 예매했었다. 트라우마도 그렇고 체력도 좋지 않아서 한 번도 스탠딩 콘서트는 가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친구들하고 같이 없으면 더 무서움을 느낄 것 같아서 이 참에 트라우마를 극복해보자 생각하고 당일날에 스탠딩 티켓을 다시 끊었다. 5시부터 10시까지 장장 5시간을 서있었지만 그동안 운동을 꾸준히 해왔어서 그런지 공연이 끝나고 극도의 어지러움을 호소한 것 빼고는 되게 행복했다. 전날도 그렇고 당일날도 상당히 우울했던지라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중간중간에 불현듯 공포가 찾아올 때는 크리스탈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그녀는 나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아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인데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나를 멋있고 강한 사람으로 생각해주고 항상 곁에 있어주는 그녀가 나는 참 고맙고 좋다.) 그녀 덕분에 나는 이제 사람이 많은 곳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잖아

나는 사랑을 응원해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공연 중간부터 encore 가 끝날 때까지 크리스탈은 한참을 울었다. 며칠 전 나온 이번 달 엘셋 점수는 그녀가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점수였다. 11월 땡스기빙 때 나랑 중국여행을 하기로 했었는데 미안하지만 여행을 못 가게 되었고 대신 그동안 마지막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며 울먹거리는 그녀의 삶의 무게가 마음에 와닿았다. 처음 은별이를 통해 크리스탈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박사과정을 졸업한 뒤 교수가 되고 싶어했고, 그 다음 해에는 교수와 변호사 사이에서 갈등했으며, 여름방학이 지난 지금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 너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야?"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가수가 되고 싶어했어... 중학교 졸업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면 예고에 갈 수 있었을텐데, 시험점수가 생각보다 너무 잘 나왔어...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바를 하나 차릴거야.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세상 구경 이야기... 술과 함께 사람들이 내 바에서 행복만 느끼고 가게 하고 싶어."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아빠의 말처럼 그 누구도 인생이 달다고 말할 수는 없다만 분명 조금 더 아픈 비극인 것은 분명하다. 내 삶의 무게도 그녀와 같을까. 사람들이 나처럼 상처받지 않도록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바램. 그래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그녀와 나. 4년간의 대학 라이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경영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수업은 수업이 아니라 그룹 테라피 시간이 될거야." 그리고 몇 주간 이어진 아이들의 생생한 증언들. 수업을 듣는 내내 괴로웠다. 사실 학생들 모두가 몇 주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자신의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야기. 이겨내려 한 것들과 이겨내지 못한 것들. 도망가려 했던 것들과 도망갈 수 없었던 것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기 위해 나약한 우리는 얼마나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가. 내가 타인에게 내가 받은 만큼의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몸에 각인된 패턴과도 같은, DNA 를 깨야만 하는, 요한묵시록과도 같은 가계도 앞에서 우리는 불안에 떨고 있다.  나와 나의 싸움 앞에서 나는 이길 수 있을까.

청춘이 아름답다고 누가 그러던가. (애석하게도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는 내 학교 졸업생이다. 신입생 환영회 때 방문한 동문회 말이나 분위기 들어보면 뻔하지 뭐.) 그러나 그 와중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이 아름다운 것은 추하게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떳떳하지 못한 주름살을 덮기 위해 갈망하는 숫자의 젊음이 아닌,

우는 와중에도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친구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아이들. 나도 아프지만 옆에서 서럽게 우는 친구를 위해 화장실에서 휴지 두 장을 빼오는 아이들. 비극의 근원 앞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죽을 것만 같던 감정을 떨쳐내려 수없이 노력하는 아이들. 아이들의 그 따뜻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따뜻함을 간직하며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 따뜻함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영원히 젊은 사람들. 미성숙하고 수동적이고 철없는 모습과는 다른, 소년과 소녀의 마음으로 희망을 품으며 사는 사람들.

이 황홀한 도취는 모든 개인이 다시 집단으로 돌아가는 경험에서 나온다. 개체들은 서로 가르던 선이 깨지고, 그들이 너나 없이 집단 속에 녹아 있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 오른다. 디오니소스적 황홀함이 바로 여기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비극의 음침한 그림자에도 이 황홀한 도취가 남아 있다.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주인공은 복잡하게 얽힌 운명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쓰라린 깨달음은 근원적인 존재와의 합일이 부활한다는 즐거운 예감이기도 하다. 몰락하여 근원적 일자와 다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개체화의 괴로움, 영원한 윤회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해탈에 이르게 된다. 쓰라린 파멸 뒤에 숨어 있는 이 무한한 희열의 세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극을 바라보면서도, 그리스인들이 은밀하게 즐긴 건 바로 이 황홀한 기쁨이 아닐까?

비극과 카타르시스에 대해 설명하며.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1>. 105p

청춘의 공허함과 비극과 그들의 실패를 노래한 공연은 분명 공연 그 이상의 목적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