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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Glaukopis 2018. 10. 15. 13:54

목 상태가 영 좋지 않아 그동안 써놓은 책 리뷰를 일단 홈피에 올리기로 했다. 블로그 글은 생각나면 바로바로 고치니까 나중에 녹음할 때쯤에는 더 완성도 높은 책 리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일상글 말고 진지하게 쓰는 글들은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고 딥하게 쓰고 싶다. 나의 글들은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변화한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라는 책을 읽었다. 부제는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출판사는 동아시아. 작가 김승섭은 현재 고려대 보건과학과에서 부교수로 일하고 있고, 사회역학자로서 차별경험과 고용불안 같은 사회적 요인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 방치되어있는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아래는 작가 소개 중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아프면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건강관리를 못해서, 내가 행동을 잘못해서." 친구가 아프면 "야, 그러니까 평소에 술 좀 덜 마시지 그랬어" 라며 넘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적인 이유보다는 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내가 신체적으로 / 정신적으로 아픈 이유는 내가 건강을 지키려는 노오력이 부족해서 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정말 내가 아픈게 단지 나만의 잘못일까?

이 책은 단호하게 "아니, 너가 아픈건 사회구조적 요인들 때문이야." 라고 말한다. 책은 총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장은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어떻게 질병에 사회적 책임을 묻게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쉽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1장에 나온 구절 중 일부를 소개한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을 자연재해로, 우연히 발생한 사고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사회적인 원인을 찾고 그에 기반을 두고 대응 전략을 마련했던 행정기관과 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시민들이 거둔 성과였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우리나라의 사례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졸음운전과 음주운전 등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폐암, 위암, 간암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은 나라. 개인 수준의 원인만을 탐구할 때는 가해자의 졸음운전이나 음주운전, 혹은 개인의 흡연이나 음주 습관 등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망이다. 즉, 한국에는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비합리적인 행위자 / 사망자의 비율이 높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과연 한국에 비합리적 행위자가 많아서 교통사고나 암 환자의 비율이 높은 것일까?

포괄적인 해석을 위해 사회적인 단계로 분석수준을 높이는 순간, 우리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개인의 비합리적인 행동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로와 연장근무에 익숙한 우리 사회. 퇴근 후 회식을 강요하는 사회. 술과 담배를 권하는 사회 등등 사회적 요인이 개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사회구성주의 이론 / 행위자 - 구조 문제 에서 논하듯 어떤 현상은 행위자만의 자유로운 의지로 인한 결과만도, 사회 구조에 따른 결과만도 아닌 행위자와 구조가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2장과 3장은 1장과는 조금 다른 구성이다. 2장부터는 한국에서 일어난 유명한 사례들을 소개하며 사회가 어떻게 그 사례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노동자부터 성소수자, 대형재난 피해자 그리고 재소자 건강까지, 다양한 사례들이 이 장에 실려있다. 예를 들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연구, 저성과자 해고와 노동자 건강, 소방공무원 인권상황, 세월호 참사 생존자 실태조사, 성소수자 건강 및 재소자 건강까지.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뉴스에서 접했을 법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왜 관련 질병에 대한 책임이 개인뿐만 아닌 사회에도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3장과 4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그리고 그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사회적 질병을 막을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지 제안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은 건강이나 보건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독자를 위한 교양서다. 다르게 말하자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책이다. 작가는 여러 논문과 사례를 인용하며 그 근거를 바탕으로 본인의 주장을 펼치는데, 작가가 주장하는 사회이념과 건강연구,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법의 변화 등의 변수들이 서로 상관관계 correlation 인지 아니면 인과관계 causation 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인용한 논문들에는 변수 사이의 관계가 명시되어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히 했다면 교양서 이상의 전문성과 탄탄한 논리근거를 갖춘 책이 되지 않았을까. 다만 앞에서 설명했듯 이 책은 논문이 아니며 이미 교양서로써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힐링도서"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가볍게 읽고 난 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힐링도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결국 이 책 또한 "그대가 아픈건 그대 스스로의 잘못만은 아니다" 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서점에 있는 다른 힐링도서보다 읽을 가치가 훨씬 더 많다. 첫째, 이 책은 자세한 통계와 그래프 및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가 아픈 것이 왜 나만의 잘못만이 아닌지 독자가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도와준다. 또한 이 책은 질병을 과하게 사회적 원인으로"만" 돌리는 것을 경계하는데, 작가는 공적 안전망이 취약한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질병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간과한다고 따끔하게 비판하면서도 간간이 독자에게 질병의 원인은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환경적 요인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는 나아가 편견과 차별을 일삼는 한국인들, 그리고 그들이 모인 한국사회가 어떻게 다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지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를 설치한 것은 독자가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질병의 원인을 생각하는데 있어 균형잡힌 시각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돕는 섬세함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고, 나는 이 점에서 작가와 이 책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둘째. 이 책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 즉 국가의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개인의 책임이라 여겼던 건강과 질병에 대해 왜 우리가 속한 사회 또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독자가 곱씹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작가는 서론에서:

지난 몇 년간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지에 대한 논문을 읽고, 소방공무원, 세월호 생존 학생, 성소수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만나고 그들의 건강에 관해 연구하며, 여러 글을 썼습니다. 이 사회가 제게 던진 질문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온전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 부족함까지도 나누며 함께 답을 찾아가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이라는 책을 떠올렸다. 어쩌면 홉스로부터 작가가 찾으려 하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가. 홉스는 자연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자연권이란 각인이 자기자신의 자연, 곧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따라서 홉스에 의하면 자연권의 목적은 자기 생명 보존이고, 한 사람은 스스로 어떻게 이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주체이다. 그런데 홉스는 자연상태를 비명횡사의 공포가 상존하는 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는 14장 4절에서 "따라서 모든 인간이 만물과 타인의 신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런 자연의 권리가 존속하는 한, 자연이 보통 인간에게 허용하고 있는 수명을 다 살 수 있는 안전은 어떠한 인간에게도, 그가 아무리 강하고 영리하다 할지라도, 결코 보장될 수 없는 법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학자들은 홉스가 주장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그가 보는 사회계약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다수의 개인이 마비된 이성을 소생시키고, 자연법에 객관적인 권위와 이성적인 설득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사회계약, 즉 국가 형성의 결과이며, 국가의 설립 목적 또는 존재 이유는 인간이 비명횡사를 피하고 그 자연수명을 다 살 수 있는 안전 확보에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는 국가가 항상 존재하는거라 당연히 여겼기 때문에 나와 국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국가 형성과 자연권의 본질을 생각해본다면 국가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하며 국내적으로 시민의 생존과 직결된 질병, 인권, 건강 등에 큰 책임을 가져야 한다. 비록 작가가 이 점을 책에 직접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건강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한국사회에서 국가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 등의 질문에 도달할 수 있도록 사유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글을 마치며. 책을 읽으며 갈수록 몰입해서 읽는 내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2장부터 나오는 사례들이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치부와도 같은 이야기이며, 가공되지 않은 날 것과도 같은 인터뷰들을 읽으며 나또한 언제든 책에서 소개된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작가가 언급한 사례들을 뉴스로만 접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한 내가 그동안 편향된 정보만을 접한 것은 아닌지, 당사자가 아닌 시선으로 이슈를 논하려 한건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모두가 국가의 경제적인 역할에 집중하는 지금, 내가 속한 공동체 즉 사회와 국가의 본질과 본연의 역할에 대하여 깊이 사유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진병운 (2006), 홉스 [리바이어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