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삼자대면: 카프카, [선고]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에게 보내는 편지 中
우리에겐 [변신]으로 더 유명한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집에 수록된 [선고]를 읽었다.
주인공 게오르크 벤데만은 젊은 상인이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아버지의 가게 일을 물려받아 일을 하게 되었으며 최근에 유복한 집안의 여자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게오르크는 오래 전부터 편지로 소식을 전하는 친구가 있는데, 친구에게 늘 소소한 일만을 적어보내던 게오르크는 드디어 자신의 약혼 사실을 친구에게 전하기로 한다.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 자신이 이 편지를 보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아버지는 되려 그 친구는 네가 지어낸 가상의 인물 아니냐며 게오르크를 의심한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운 아버지는 갑자기 그 친구를 잘 알고 있다 하면서, 그가 바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수 페이지 정도 분량의 대화와 다툼 끝에, 아버지는 게오르크에게 익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마치 그 선고를 오래 전부터 기다려 왔던 것처럼,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가로 달려가 자신의 몸을 던지며 이야기가 끝난다.
[선고]는 카프카가 1912년 9월 22일 밤 10시부터 23일 새벽 6시까지 짧은 시간동안 단숨에 써내려간 단편소설이다.1 (카프카는 이 소설을 쓰던 당시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열림의 상태를 맛보았다”고 한다.2) 카프카는 [선고]를 쓰던 당시 가업과 자신만의 고유한 삶 사이에서 깊이 갈등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마련해준 석면 공장과 약혼녀는 독신자의 삶과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그의 기존의 삶에 큰 부담이 되었고, 카프카는 곧 시민적인 삶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3 이런 그의 배경을 고려할 때, 게오르크는 작가인 카프카 자신의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또 다른 등장인물인 “아버지”의 지위는 게오르크와 동등하다 보기는 어렵다.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의 대사는 주인공 게오르크에게 하는 말인지, 러시아에 있는 친구에게 하는 말인지 해석하기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아버지는 특히 소설의 말미에 게오르크를 맹렬히 비난하는데,
“너는 성숙하게 되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오래 머뭇거렸던 것일까!”
“그러니까 넌 이제야 너 말고도 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겠지.”
이 구절들은 사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깨닫게 되는 그것과 조금 더 비슷하다.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카프카의 초자아 Superego 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 (참고)의 이미지에, 자신 내면의 여러 자아에게 가지는 복합적인 감정을 초자아에 불어넣고는, 아버지의 이미지 속 권위를 빌려 세속적인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오르크 / 카프카 자신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파멸해가고 있는 피폐한 모습의” 친구는 카프카의 어떤 자아일까. 소설의 여러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친구는 고향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러시아로 가서 사업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이 독신으로 살고 있으며 게오르크 / 세속의 카프카는 그를 “분명 잘못된 길로 들어선 이런 남자, 동정은 가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이런 사람에게 무슨 말을 써 보낼 수 있을까?” 라며 은연중에 그를 무시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오르크보다 파멸해가는 친구를 더 마음에 들어하는데, 이는 친구가 게오르크 / 카프카 의 내면 속 자아 이상 Ichideal 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고 유복한 집안의 처녀와 약혼하는 것에 만족하는 상인 게오르크와 달리, 친구는 기존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며 비록 남루한 모습일지언정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난 이런 사람이니까. 그 친구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그 친구와 지켜온 우정을 위해 내 자신에게서 현재 모습의 나보다 더 적합한 인간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거야.”
게오르크는 자신의 세속적인 삶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 우정이었으며, 게오르크 / 카프카 또한 마지막에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오래 속여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이상을 돌보지 않았다. 카프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을 실현해줄 자아를 회피하고, 또 외면했다.
결국 카프카는 게오르크를 다리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다.
우리는 자아분열을 강요받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당장도 얼마나 많은 나 자신을 스스로부터 격리시키며 살아가는가. 강가 근처에 집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고 살아가고 싶은 나, 노래하고 연기를 하며 자아를 성찰하며 살아가고 싶은 나, 아무 것도 안하고 책만 읽으며 하루를 보내고 싶은 나, 어느 날 강렬하게 나에게 찾아온 꿈을 이뤄보고 싶은 나, 내면의 끝에 도달해보려 하는 나. 회사나 교실을 갑자기 뛰어나가 공원의 잔디밭에 드러눕고 싶은 나. 우리는 오늘도 또다른 자신을 죽여가며 살아간다.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모든 자아와 이상을 억압한 채 우리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도구화한다. 그리고 나아가 서로를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모든 기준은 종종 “돈”, “비싼 물건” 그리고 “사회적 성공” 이 되곤 한다.
“난 지금 여기서 만족할래.”
“그건 배부른 소리지.”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진로를 바꾸면 안돼.”
“너가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어.”
물질적인 풍요는 삶에 있어 중요할지언정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갈증을 해소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아는 무엇을 원하는가. 자아를 분리해야 한다고 그렇게 사람들은 말하지만, 분리 이후에 남은 나의 단면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추하고 또 초라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또 다른 면도 인정하고, 나 스스로를 포용할 때 우리는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나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모든 세속적 잣대를 버리고 진짜 나를 사랑할 시간이 왔다.
참고문헌: 곽정연 (2005). 프란츠 카프카의 [선고] 에 나타난 자아분열. 카프카연구, 13, 1-16.
사진 출처: Mumbai: 15-Year-Old Boy Jumps To Death After Being Reprimanded By Mother For Using Cell Phone, https://www.mid-day.com/articles/mumbai-15-year-old-boy-jumps-to-death-after-being-reprimanded-by-mother-for-using-cell-phone/19429188
- 곽정연 (2005). 프란츠 카프카의 [선고] 에 나타난 자아분열. 카프카연구, 13, 1-16. ↩
- Vgl. Wiebrecht Ries, Franz Kafka. Eine Einführung von Wiebrecht Ries. München / Zürich 1987. (Artemis Einführungen; Bd. 33) S. 39; Erich Heller / Joachim Beug (Hg.): Dichter über ihre Dichtung. München 1969, S. 42. ↩
- 권혁준. (2013). 카프카 단편집. 지식을만드는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