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선, [사진 철학의 풍경들]
아는 선배께서 사진촬영을 좋아하는 것 같아 샴페인과 함께 이 책을 선물해드리려고 했는데,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 선물했다가는 큰 실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새벽 3시에 내가 좋아하는 바흐 관현악 모음곡 2번 B단조와 함께 다시 한 번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몇 가지 생각하기 좋은 구절이 있어서 이 책을 나의 책장에서 떠나보내기 전에 기록하려 한다.
p. 33-35: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은 변하지 않았다.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다. 사진이 거짓말을 했다면 사진을 다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진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사실로 받아들여달라고 한 적도 없다. '사실 그대로만 말한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
이처럼 사진은 모순을 가지고 탄생했다. 사진은 순간이라는 본질에 대한 진실을 담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진실' 혹은 '거짓'을 가지고 있는지는 사진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자들의 몫이다. 기술적으로는 있는 그대로를 담으면서도 작가가 의도를 가지고 왜곡하여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진이다.
p. 39: 사진은 빛그림이다. 어둠으로 가득 찬 빛의 그림자. 어둠이 만든 빛나는 상이다. 카메라 루시다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규칙성은 피사체를 인식하는 전통적인 기억의 인식이다. 어둠을 볼 줄 아는 눈은 단순 사유의 능력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존재 인식이다... 진짜 본질적인 감각은 어둠을 볼 줄 아는 감각이다.
사진에 대한 편견을 없애줄 또 다른 구절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을 시각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정말 본질적인 감각은 눈에 보이는 것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자유롭게 다루는 능력이 아닐까.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순간의 기록을 남기는데 있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p. 47-48: 사진함은 사진을 통해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작고 하찮지만 충만한 해석을 기다리는 피사체와의 만남이다. 렌즈 앞에 놓인 수많은 피사체들, 그 많은 피사체 가운데 사진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사진함은 하찮은 사물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다. 사진이 철학과 만날 수 있는 공통적인 지점은 바로 하찮은 사물이 놓인 '거기 있음' 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알고 미미한 존재감을 헤아리는 것이 철학함이고 사진함이다.
우리는 모두 성공하고 싶어한다. 작은 존재, 하찮은 존재보다는 크고 위대하고 쓸모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산업화에 따른 효율과 생산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존재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상대적으로 경시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여기든 거기든, 작든 크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세속적인 꿈이 없어도 좋다. 성공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된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된다. 다만 끊임없이 세상을 배우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p. 49: 철학자들은 생의 정직함과 삶의 쓸쓸함이 오히려 뒷모습에 투영된다고 말했다. 포장하기에 급급한 앞모습보다 솔직히 드러나는 뒷모습이 더 진실할 수 있다고 말한다... 뒷모습이 진실이라는 말은 솔직한 존재감 때문이다. 꾸미고 장식되고 포장된 앞모습보다 꾸밀 수 없고 속일 수 없는 뒷모습이 더 정직하다는 뜻이다. 사진도 뒷모습을 통해서 절실한 생의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다. 뒷모습을 통해서 더욱 깊은 삶의 무게, 진솔한 생의 자국을 헤아릴 수 있다.
우리 모두는 sns에 잘 나온 나의 정면 사진 혹은 셀카를 올린다. 하지만 그게 정말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아니 어쩌면 진짜 나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셀카가 아닌 나의 뒷모습 아닐까.
p. 59: 예술 작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며, '창조란 곧 정신의 반짝임' 이라고 그는 인식했다.
IR과 이콘 같은 진부하고 오차없이 냉정해야 하는 과목을 전공한 나도, 법을 전공한 누군가도, CS를 전공한 누군가도, 모두 다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분야들을 예술적으로 접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통념을 뛰어넘거나 조건 없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동으로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사람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그들 중 몇몇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만, 그렇지 않은 몇몇은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직업과 성격에 상관없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
p. 76-77: 한 장의 사진은 대상의 존재함 (거기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포착하는 시간의 존재감이며, 대상이 지니고 있는 시간성의 포착이다. 이때 사진의 존재는 대상의 존재이며 동시에 대상이 지닌 시간의 존재이다. 사진가가 알아챘건 못 알아챘건, 알고 찍었건 모르고 찍었건 모든 사진은 존재가 드러낸 시간이다.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사진이 곧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실제라고 말하는 것도 현존재 및 시간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와 시간의 실제적 접촉이다.
본문의 내용이 나의 의견과 정확하게 일치하기에 사견을 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p.80: 인간이 시간을 이기는 방법은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시간을 포획하는 방법은 순간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는 것이다. 사진의 오랜 구호는 '순간에서 영원' 이다. 시간에 대한 인류사적 염원을 담고 있다.
순간에서 영원.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다보면 내가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인간이 붙잡을 수 없이 떠나가는 시간을 이기는 유일한 순간이다...
p.88-89: 그러나 어떻게 찍든 간에 모두 정신의 현상 속에 있다. 또 의식의 변증법 속에 있다. 모든 사진적 행위는 자기가 자기를 아는 정신의 의식이다. 자기가 자기라는 거울에 비춰보는 의식의 정신이다. 우리의 사진적 행위는 자기 대화의 정신이고, 자기가 자기에 대해 판단하는 의식이다. 우리의 모든 사진적 표현은 내가 나를 향한 정신의 현상학이면서 또 내게로 돌아오는 의식의 변증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진은 정신 없는 사진, 의식 없는 사진일 것이다.
p. 108: 사진은 인식이다. 모든 것들이 피사체 앞에서 동시적으로, 순간적으로 상상된다.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의식으로서 격발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적 섬광이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아성찰이 없는 행위는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p. 199: 그렇다. 지금껏 똑같은 작품은 없었다. 아니 똑같은 작품은 있을 수 없다. 오천 년 미술사에서 단 한 번도 같은 작품이 출현한 적은 없다. 동일해 보일 뿐이다. 그 역도 가능하다.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본 적이 없는 그림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생각조차 불가능한, 차이의 정도. 차이의 간극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그림은 차이의 출현, 차이의 반복일 뿐이다.
이 개념을 좀 더 확장시키면 내가 몇 년 전 WRIT 150 Globalization 수업 에세이로 썼던 Authenticity of Counterfeit Goods in the Globalized Era 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과연 우리가 말하는 짝퉁은 진정성 그리고 예술적 가치가 결여된 자본주의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 역시도 예술적 가치와 나름의 진정성을 가진 또 다른 창조물로 생각해야 할까? 최근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앞다투어 가품 매장을 열고 가품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는 현상 ([스타일+] ‘GUCCY' 가짜 만드는 명품, 왜?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13/2018031301974.html)을 보면 이 질문의 해답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여기에 적고 싶은 문단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다 적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만 글을 줄인다. 한 3-4시간 집중해서 읽으면 다 읽을 분량의 책이지만,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 읽기에는 더더욱 좋은 책이다. 모두의 독서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책을 선물하는 것은 사실 조심스럽다. 그저 선물을 받을 그 분께서도 이 책을 흥미롭게 생각해주시길 바랄 뿐.